팀의 변화가 있었고 새로운 매니저분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함께 지켜봐주신 다른 팀 리드분께서 조언을 해주셨다. 글로벌 기업을 다닌 분이었는데, 미국에선 새 매니저와 원온원에서 나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고 한번 시도해보기를 권해주셨다. 이력서 같은 걸 활용해도 좋다고.
나한텐 낯선 방식이었다.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나를 소개하는 문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경력 요약 정도로 생각했는데, 쓰다 더 명확하고 깊어졌다. aka. 나라는 사람의 사용설명서. 내가 어떻게 켜지고, 무엇으로 움직이고, 함께 일하려면 뭘 알면 되는지. 쓰다 보니 알았다. 이건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었다. 이걸 아시면 저를 잘 쓰실 수 있습니다. 라는 목적을 가진 글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을 탄다. 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나를 잘 쓰는 환경과, 나를 잘 못 쓰는 환경을 내가 아는 것. 그건 환경이 대신 해주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한다. 이 커리어 중간과정의 아웃풋은 1on1을 준비하는 문서가 되었다.
문서는 아래의 항목으로 진행된다.
1. 내가 걸어온 길
나는 zero-to-one이 즐거운 PM이다. 모호한 상태를 작동하는 제품으로, 그 제품을 성장으로 바꾸는 일을 즐긴다.
시작은 디자인이었다. 그러다 창업을 했다. 작은 라이브 커머스를 만들었는데, 초기 성장 중에 가치관과 맞지 않아 접기로 했다. 그 뒤로 PM이 됐고 빠르게 크는 서비스에서 신규 기능을 맡아 성장에 기여했고, 가장 최근엔 AI 제품 하나를 단독 PM으로 런칭부터 운영까지 가져갔다.
한 줄로 화려하게 요약되진 않는다. 대신 직접 만들고, 직접 실패해봤다. 그 길에서 내가 일을 어떻게 정의하는지가 또렷해졌다. 나는 맡은 일을 성공으로 만드는 사람을 PM으로 생각한다.
2. 나는 일을 이렇게 본다
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로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건 따로 있다. 서비스가 성장하는가, 비즈니스가 되는가. 내가 쓴 시간이 그 결과로 실제 이어지는가.
그래서 '오래 버티는 것'은 내 기준이 아니다. 내 시간을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게 기준이다. 세 가지로 점검한다.
여기서 배우고 있는가.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며 실력이 느는가, 익숙한 일을 반복하며 시간만 흐르는가.
내 시간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드는가. 누군가의 문제를 실제로 풀어내는가, 조직 안에서 잘 보이려고 쓰는가.
곁에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함께 성장하고 있는가?
3. 지금 나는 어디쯤 있나
요즘 내 에너지는 예전 같지 않았다. 솔직한 이유를 적었다.
4. 나 설명서 -> 여기가 핵심!
나를 빨리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를 적는다.
나는 어렵고 새로운 문제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배울 게 있는 사람들 곁에서. 그 둘이 갖춰지면 가장 잘한다. 풀어본 적 없는 문제일수록, 옆에 닮고 싶은 사람이 있을수록 나는 살아난다. 그때의 나를 보여주고 싶다.
반대로 힘이 빠지는 지점도 분명하다. 기본을 처음부터 다시 짚어야 할 때. 이미 합의됐어야 할 것을 또 합의하느라 시간을 쓸 때. 그래서 나는 기본기가 단단히 공유된 팀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 베이스가 탄탄해야 우리 에너지를 진짜 어려운 문제에 쓸 수 있으니까.
피드백은 솔직하고 직접적인 쪽을 훨씬 선호한다. 듣기 좋은 위로보다, 그냥 똑바로 말해주는 게 나한텐 훨씬 쓸모 있다.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그렇게 건네고 싶다. 그리고 미뤘다 특정 시점에 쏟아내기보다 즉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건강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5. 그리고, 내가 알아야하는 추가 설명서
사용설명서를 쓰다 보니, 한쪽만 적는 건 반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엔 매니저님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일하고 소통하는 걸 선호하는지. 좋은 PM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하면 잘하고 있다고 보일지. 피드백은 어떻게 주고받고 싶은지. 지금 이 팀과, 나와의 협업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등 이제 내가 일을 잘하기 위해 추가로 지침해야하는 영역들이었다.
남에게 나를 설명하려다, 나를 알게 됐다.
매니저님에게 주려고 쓴 문서였다. 그런데 다 쓰고 나니, 제일 많이 알게 된 사람은 매니저가 아니라 나였다.
그동안은 그냥 굴러갔다. 켜지는 줄도, 꺼지는 줄도 모르고. 이번엔 그걸 글로 꺼내야 했고, 꺼내고 나니 보였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나고, 어떤 환경에서 시드는지. 이제는 그걸 조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그런 환경을 고르거나, 없으면 만들면 된다.
남에게 나를 설명하려다, 나를 알게 됐다. 여기까지가 내가 최근에 한 커리어 중간 점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