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해커톤에서 만든 슬랙봇, '잉금(Ingeum)'. 사내에서 쓰는 영어를 우리 회사식으로 다듬어주는 영어 코치 봇이다. (영어 동아리 이름이 잉금잉금, 그 잉금을 따왔다) 이 글은 잉금을 어떻게 기획했는지 정리한 내용이다.
시작은 영어였다
영어로 급! 업무를 해야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따로 공부도 해봤다. 퇴근하고 영어 학원도 다녔다. 근데 잘 안 됐다. 퇴근하고 학원가는거 너무 어렵더라. 그리고 영어학원에서 배운 단어를 바로 업무에 적용하기엔 내 영어 실력이 너무 비루했다. (빨래를 개다 이런거 배워서 회사에서 써먹을 일이 없었음)
그러다 생각을 뒤집었다. 공부하러 따로 가지 말고, 그냥 일하는 자리에서 늘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어차피 하루 종일 켜놓는 곳에서 언어를 습득하자.
회사에서 쓰는 말이 제일 중요하다
내 목적은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거였다. 그러니 제일 중요한 건 멋들어진 영어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실제로 쓰는 말이었다.
범용 번역기는 '스프린트'를 엉뚱하게 풀기도 한다. 우리 제품 이름도, 팀에서만 통하는 표현도 모른다. 클로드도 정확하겐 모른다. 그래서 잉금은 실제 채널 대화에서 '우리 회사식' 표현을 익힌다. 범용 도구로는 안 되는 그 부분. 내가 굳이 내 봇을 만든 이유가 여기 있다.
번역 한 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 하나 더 있었다. 번역기는 한 번 쓰고 끝이다. 나는 그걸로 영어가 '늘었으면' 했다.
그래서 잉금은 하루 리듬을 탄다. 낮엔 업무 중에 번역하고 고쳐주고, 퇴근할 땐 오늘 쓴 표현을 리포트로 정리해주고, 다음 날 아침엔 그 표현으로 퀴즈를 낸다. 쓰고, 정리하고, 복습하고. 이 고리가 돌면 번역기 한 번이 아니라 '학습'이 된다. 이게 내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거다. 일상 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유저에게 없는 습관을 만들기 보다 평소 하는 루틴안에서의 틈새를 찾아 공략하자. (출퇴근길)
왜 슬랙 안에 만들었냐면
여기서 좀 PM스러운 얘기를 하면, 나는 잉금을 따로 앱으로 안 만들고 슬랙 안에 넣었다. 이유가 두 개다.
하나는, 따로 앱을 켜게 하면 안 쓰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안 쓴다. 이미 하루 종일 켜놓는 슬랙 안에 있어야 흐름을 안 끊고 영어가 는다. 그리고 데이터의 원천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다.
또 하나는, 만들 걸 줄여주기 때문이다. 슬래시 커맨드, 알림, 정해진 시각에 메시지 보내기, 나만 보기 등, 내 학습 루프에 필요한 게 슬랙엔 이미 다 있었다. 나는 그 위에 로직만 얹으면 됐다. 내가 짠 기획을 슬랙이 그대로 받쳐준 셈이다.
진짜 비결은 기획이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에이, 평소에 AI 많이 써본 사람이니까 쉽게 만든 거 아니야?" 맞다, 나 AI 많이 쓴다. 근데 그게 비결은 아니다. AI를 아무리 잘 다뤄도, '뭘 만들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나온다.
멋진 봇이 먼저 나온 게 아니다. 그 전에 기획서 한 장이 먼저 있었다. 딱 이 네 줄이었다.
이걸 그대로 클코에게 던졌더니, 코드는 AI가 다 짰다. 아주 작은 연결(셋팅) 만 내가 했다. 내가 한 건 '무엇을 만들지'를 또렷하게 정한 것뿐이다. 만드는 건 AI가, 기획은 내가.
사람들이 반응한 건 번역이 아니었다
기능만 떼서 보면 잉금은 그냥 '번역기'다. 근데 사람들이 "나도 써보고 싶다"고 한 건 번역 때문이 아니었다.
반응이 온 건 디테일이었다.
회사 데이터를 원천으로 쓴 것.
그걸 아침저녁 학습 루틴으로 묶은 것. 그
리고 그날 쓴 표현을 리포트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것.
나는 이게 기획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런 엣지 포인트들. 매력 있는 제품은 여기서 갈린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비개발자거나, 바이브 코딩 이제 막 시작한 분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안 만들어도 되는 건 안 만들면 된다.
나는 슬랙이라는 안정된 플랫폼 위에 로직만 얹었다. 알림도 화면도 직접 안 만들었다. 그게 이미 잘 굴러가니까. 초보가 처음부터 만든 기능은 잘 깨지지만, 검증된 플랫폼 기능은 안 깨진다. 코드냐 노코드냐의 문제가 아니다. 더 입문이라면 아예 노코드 툴도 같은 이유로 좋은 선택이다. 안정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빨리 쓸 수 있으니까. 내 힘은 아까 그 디테일에만 쏟으면 된다.
지난 글에서 나는 그냥 AI한테 말을 걸어보라고 했다. 그 다음 단계가 이거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만드는 건 이제 AI가 한다. 그러니 남은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다음에,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제품이 아니라 왜 그 제품을 써야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