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나는 "준비되지 않은 채 기회가 왔다"고 썼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났다. 영어로 일한 지 두 달. 솔직히 말하면, 100%는 영어로 일한건 아니다. 그 두 달을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정직하게 적어보려 한다.
처음엔 의지가 전부였다.
첫 달, 나는 퇴근하고 매일 평일에 영어 학원에 갔다. 근데 너무 힘들었다. 업무에 온 에너지를 다 쓰고, 그다음에 또 학원이라니. 집중도 안 되고, 체력의 한계를 정말 크게 느꼈다.그래도 갔다. 처음엔 문법 같은 건 맞추지도 못했지만, 단어를 그냥 막 뱉었다. 그게 묘하게 효용감이 있었다. 새로운 도전에 설렘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어가 싫어졌다.
여러 곳에서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랬더니 영어로 말하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정확히는 영어로 시작된 스트레스는 아니였다. 다른 방향에서의 스트레스들이 순식간에 몰려왔고 이런 이유들로 일에대한 의지도 사라졌다. 의지로 시작한 일은, 의지가 떨어지는 순간 가장 먼저 무너진다. 영어는 업무를 잘하기 위한 나의 수단이었고 의지에 엮여있던 영어는 1순위로 놓아버리는 일이 되었다.
통역은 '복사, 붙여넣기'가 아니었다.
딱 한 달을 채우고 나니, 영어 미팅이 늘었다. 함께 일하는 외국인 분은 배려가 깊었다. 천천히, 쉬운 단어로 말해주셨다. 하지만 외국인이 많은 미팅에 들어가면 영어가 와다다다 쏟아졌다. 다행히 한국인 멤버분들이 계셨고, 영어를 잘하시는 분들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통역해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걸 발견했다. 나는 통역이 그냥 내 말을 copy & paste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내가 한 말을 본인이 이해하고, 영어로 적절하게 다시 재구조화해서 설명하는 능력. 그걸 실시간으로 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진짜 언어 능력은 '영어를 안다'가 아니라,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구조화하는 능력이구나. 추가로 말하는 사람의 언어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변경해서 전달하기까지. 영어로 일한다는 건, 단순히 '영어로 말할 수 있다'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을 구조화하는 능력의 범위, 그리고 듣는 사람의 난이도 조절까지 적용하여 사고하는 것이 포함된 일이었다.
하필, 가장 치열해야 할 시기였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런 것들이다.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는 것. 그걸 로드맵으로 구체화하는 것. 모든 일에 "왜?"를 묻고, 맞춰가고, 논의하는 것. 제품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타협할지 판단하는 것. 이건 가장 많은 치열한 논의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일할때 가장 중요하게 적립되어야하는 개념들이다.
영어로 일한다는 건 영어를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고 구조화하는 사고 능력의 문제다. 그리고 그 능력이 가장 필요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기에 영어를 내려놨다.
모든 근육이 한 번에 자라지는 않는다.
영어로 말하는 능력
말하면서 구조화하는 능력
생각을 정리해 논리적으로 말하는 능력
이건 다 다른 근육이다. 여기에 언어와 상관없는 업무 스트레스까지 더해진다. 이 전부를 한 번에 돌파하려 하면, 남는 건 스트레스뿐이다. 그래서 힘이 들 때, 나는 가장 힘든 영역부터 손을 떼게 되게 되었다. 나에겐 영어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깔끔한 전략적 판단이 아니었다. 업무에 대한 마음이 무너지면서, 거기 엮여 있던 영어 의지가 같이 무너진 거다.
대신 나는 '일이 되게 만든다'에 집중했다.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논리적인 설득과 다각도의 질문을 스스로 더 많이 던져보았다. 영어로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스트레스받는 건,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그래서 가끔은 통역에 능한 분들의 도움을 받고, 어떨 땐 AI의 툴을 활용했다, 그 모든 걸 동시에 쓰면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솔직해지려고 한다.
이게 현명한 우선순위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가장 불편한 영역을 회피하면서, '일이 되게 만든다'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걸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나는 준비된 채로 기회를 맞은 게 아니다. 기회가 먼저 왔고, 나는 그 안에서 헤매는 중이다. 감사하게도 환경이 이 부분을 양해해줘서, 이렇게 버티며 풀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다음이 무엇인지,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두달이 지난 지금 이 모든걸 극복하고 행복하게 일하고 있답니다. 라는 글을 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닌 결과를 맞이한 지금이다. 하지만 이 여정은 계속 기록할 생각이다.